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호치민 루트]]와 구찌터널 ===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무리없이 상황이 종료될 거라고 미국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갔다. 미 국방부는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국력상 북베트남보다 훨씬 우월했던 [[일본 제국]]을 정글전에서 떡실신시켰던 미군이 베트남에서는 유독 고전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치러진 장소만 비슷할 뿐 모든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단 [[일본군]]은 북베트남, 베트콩과 같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군대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정규전을 수행한 군대였기에 베트남전과는 흐름이 전혀 달랐다. 그리고 일본군은 멀리 떨어진 일본 열도에서 배로 보급을 실어날라야 했기 때문에 미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차지한 이후로는 보급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지만, 북베트남은 육로를 통해 중공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급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미군은 북베트남이야 신명나게 폭격을 해댔지만, 중국과 충돌할 것을 우려하여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까지는 폭격하지 못했다. 북베트남 측에선 구찌터널을 교묘히 이용하여 보급로를 숨겼던 데다 우거진 정글에서 정찰하고 표적을 식별하는 건 21세기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북베트남군 역시 전투기나 대공포로 계속 반격을 한 탓에 '''폭격 효율이 쓰레기 수준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미군이 뭔 짓을 해도 북베트남군의 보급을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었다. 한국전에서 한 번 데였던 중국을 경계해 북베트남 본토로 진공할 수도 없었다. 아시아의 쌀농사 문화권의 인구밀도야 말할 것도 없고, AK 정도의 군수물자는 중공이 공급해 주니, 결국 베트남 인구 전체와 개인화기로 딱콩딱콩 싸워대는 전쟁이었다. 즉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냅두고 잎사귀를 하나하나 따서 말려 죽이는 꼴인데, 나무가 메말라 죽는 것보다 사람이 지치는게 빨랐다. 그 나무에 비료를 주는 힐러([[제2세계|공산권]])까지 붙어있었으니. 물이 틀어진 수도꼭지를 잠그는 대신 흘러나오는 물만 주구장창 닦는 모양새인 것이다. [[정글]]은 녹색 사막이라 불릴 정도로 인구부양력이 매우 낮으니 시가지와 개간지를 점령하고 버티면, 정글 게릴라들은 닥돌하고 죽든가 굶어 죽든가 시한부 생명이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앞서 말했듯 미군이 적의 보급을 끊는 게 불가능했는데, 이 상태에서 베트콩들이 이미 태평양 전쟁에서 그 위력이 입증된 땅굴전술까지 이용하기 시작하자 미군은 끊임없이 피해가 누적되면서도 적의 화력을 유의미한 수준까지 줄이지 못했다. 그 땅굴 전술 중 가장 유명한 땅굴이 구찌터널이다. 구찌터널이 있는 지방의 흙은 처음에는 부드러워서 호미로도 쉽게 파낼 수 있지만 비 오는 날에는 흙이 굳어버리는데 전차가 지나간 자리에도 베트콩 지하기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지하기지가 있음을 안 미군은 입구를 찾기 위해 독일산 군견들도 동원했지만 되레 베트콩은 고춧가루를 여기저기 뿌리거나 미군들의 물품으로 후각을 잃게 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어떻게 입구를 찾아도 베트콩 지하기지의 입구는 체격이 작은 베트콩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기 때문에, 덩치 큰 대부분의 미군은 들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모양이 똑같은 가짜 출입구도 많아서 정확한 입구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미군은 체격이 작은 병사들을 뽑아 땅굴쥐라고 불리는 땅굴 전담 특수부대를 동원하는 것으로 대응했으나, 베트콩은 교묘한 위장입구를 만들어 전갈이나 독사를 풀어놓거나 부비트랩에 개똥을 발라놓는 방식으로 맞대응했다. 베트콩 지하기지는 통로도 너무 좁아서 고작 권총 정도나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장점이였던 중화기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땅굴쥐 특수부대의 소지품이래봐야 랜턴, 칼, 권총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이니 어떻게 정확한 입구를 찾아 터널 안에 들어가도 베트콩을 만나면 대응 방법이 없이 죽어야만 했다. 반면 한국군은 땅굴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최루탄으로 대응했는데, 최루탄을 뿌려놓고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못 참고 베트콩이 나오면 사살했다. 굳이 기어들어갈 필요 없이 침착하게 대응하면 된다는 것.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미군은 사단급 이상 대규모 작전에 익숙했는데 베트남의 정글에선 대규모 작전이 어려웠고 결국 중대급 이하, 소대단위 편제로 소규모 작전을 가장 많이 수행하게 되었다. 문제는 소규모 작전에선 즉각적인 포병화력이나 항공화력의 지원이 어렵다는 것이다. 베트콩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싸우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다. 사실 땅굴 전술은 이미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써서 미군에게 가공할 만한 피해를 강요한 전술이었지만, 이 때 일본군은 제해권을 몽땅 빼앗겨 섬에 고립된 채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싸웠기 때문에 추가 보급이 없어서 전투가 진행되면 될수록 일본군의 화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 정글의 나뭇잎, 풀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 사용한 [[농약]]이 현재 사용이 금지된 그 유명한 [[고엽제]]다. 미군이 고엽제와 폭탄으로 융단폭격을 해도 지하 3층 규모의 터널의 2층까지만 파괴가 되어 실효를 거두진 못했다. 결국 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찌 터널의 규모조차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총연장 230km에 수만 명에 달하는 베트콩들이 이 지하 터널 안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 덕분에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 소총]]을 든 미군이 [[UH-1]] 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우는 전형적인 베트남 전쟁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몰래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치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소련]] 등은 주변 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남베트남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치민 루트를 타격하고, 어마어마한 공군 폭격을 감행했으나 효과는 미미했고[* 물론 도로를 파괴하는 등의 물리적 효과는 확실히 있었으나 북베트남인들의 끈질긴 복구작업이 반복되었다.], 호치민 루트는 전쟁 내내 건재했다. 게다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와 라오스의 '''파테트라오''' 등의 공산 반군이 호치민 루트 형성을 지원하고, 이들 두 국가의 정부는 이를 막을 능력이 전혀 없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는 베트콩들이 땅굴을 파고 호치민 루트를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눈감아주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내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러자 쫓겨난 시아누크가 선동하여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같은 공산계 게릴라가 준동해[* 시아누크의 오른팔이었던 론놀 장군이 미국이 자국에 융단폭격을 하는 것을 허락하자, 주민들이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게 된다.]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 혼란에 빠져버려 호찌민 루트를 막는 것은 더 어려워져 버렸다.(그 뒤 크메르 루주는 시아누크의 일가를 학살하며 통수를 친다) 라오스는 미군 병력의 직접적인 침공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남베트남군이 '''람손 719 작전(Lam son 719)'''을 발동해 라오스 영내로 쳐들어갈 때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였다. 남베트남이라도 정신줄을 잡고 있었냐면 '''절대 아니었다.''' 남베트남군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말이 딱 맞았는데 한두 개 사단급 제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수준이었고, 그저 미국이 다 해주겠지 하는 안일한 정신으로 아무것도 하는 게 없었다. 물론 변호의 여지는 있다. 전쟁은 잘 몰랐을지언정 그나마 유능하고 강력한 초대 지도자였던 지엠 대통령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로 황천으로 떠나고, 뒤따른 혼란으로 기회를 잡은 베트콩들은 광범위한 농촌에서 설치며 장병들의 가족들을 살해하고 고문하는 판인데 대부분의 장군들은 권력다툼에만 바쁜 상태에서 누가 제대로 싸우겠는가? 이는 미국이 남베트남군을 크게 불신해 적극적인 전투임무 대신 미군기지 경비 같은 임무만 맡기면서 더 악화된다. 미군은 대체로 남베트남군을 불신했고, 정말로 군인다운 일부를 제외하고는 푸대접했다. 더 막장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떠돌다가 북베트남군/베트콩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 정부군에게 빼앗거나 전장에 유기된 미국제 무기를 사용하는 베트콩의 존재는 미군의 전면적 개입 이전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베트남화'''가 이뤄진 전쟁 말기까지 남베트남군은 꾸준히 미군 사상자와 거의 동일한 수치의 사상자를 냈다.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이 지형전술에 무지했던 미군과 약체인 남베트남군만 공격하기도 했고, 어쨌든 베트남 땅에서 벌어진 베트남인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베트민들은 사정이 다른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 때문에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과 미군보다 더 골칫거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